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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학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 기존의 이론과 관습들을 변화시킨 영국 경제학의 대표자이다.

'케인스 경제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시해, 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해서 재정정책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현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서,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경제학자인 해리 존슨(Harry Johnson)은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을 이해하는데 그의 유년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케인스는 언제나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라든지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공무원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평생 가지고 있었다.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첫 번째는 케인스는 영국의 절정에 오른 막강한 힘을 직접 본 마지막 세대이다.

두 번째로 케인스는 전문적 지식보다 문화에 의해 통치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 마지막 세대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주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케인스는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마거릿이라는 여동생과 제프리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존 네빌 케인스(John Neville Keynes) 역시 경제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도덕과학 강의를 하였었다. 케인스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케인스(Florence Ada Keynes)는 지역의 사회개혁가였다.

경제학자이자 케인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스키 댈 스키( Skidelsky)에 따르면 케인스의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주의도 많이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은 자식들이 언제나 돌아와서 쉴 수 있도록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다.

케인스가 1929년 대공황의 시작으로 그의 자산을 거의 잃었을 때도 존 네빌 케인스는 자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케인스가 장학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케인스가 젊을 때 재정적 지원도 해주었다.

 

케인스는 유년기 시절 교육을 주로 집과 학교에서 받았다.

퍼스 학교 유치원(The Perse School nursery)에 2년간 다닌 뒤 1892년에 세인트 페이스(St Faith)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의 교사는 케인스는 똑똑하지만 때때로 주의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결정력이 부족한 아이라고 평가하였다.

케인스는 유년기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장기 결석을 하곤 했다.

케인스는 1897년에 장학금을 받고 이튼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으며, 특히 수학, 고전, 역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케인스는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곤 했다.

이튼에서 케인스는 그의 인생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후에 영국의 총리가 되는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이었다.

 

1902년 케인스는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에 입학한다.

케인스가 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특히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의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앨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은 케인스에게 경제학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케인스는 뛰어난 학생들이 모여 논쟁을 펼치는 비밀결사 케임브리지 어포 슬 그(Apostles Society)의 활동적인 멤버였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졸업 후에도 소다회에 유대감을 유지했으며, 평생 시간 날 때마다 클럽 모임에 나가곤 했다.

케인스는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Cambridge Union Society)와 케임브리지 대학 문학 클럽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1904년 5월 그는 수학에서 일등으로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 후 2년간 가족이나 친구들과 휴일을 보내는 대신에 대학교 학업에 충실하였다.

그는 논쟁에 참여하였으며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생 신분으로 경제학 강의를 듣고는 했다.

1905년엔 케임브리지 졸업시험(Tripos)을, 1906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케인스는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흔히 일반이론이라고 불리는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은 기존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시장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유효수요이론을 제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후엔 선진 서양 국가들은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 대부분의 서양 국가가 케인스의 이론을 채택하게 된다.

1970년대에는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세계 경기가 침체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부각되기 위해 시작하면서 케인스학파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일 뿐 정부의 개입을 촉구한다는 측면에서 케인스학파는 관료 사회에서 여전히 주류의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2007~2010년 금융 위기 사태와 함께 신자유주의 노선이 쇠퇴하면서 케인스 경제학은 다시 조명받기 위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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